김작가의 일상풍경②

요즘 인기리에 방영중인 드라마 ‘호텔 델루나’의 장르는 판타지 호러 로맨스물이다.

처음 제목만 봤을 때는 재벌과 호텔리어가 근사한 호텔공간에서 펼치는 크고 작은 사건이나 에피소드를 다룬 로맨틱코미디물이려니 했었다. 웬걸, 아니었다. ‘델루나’라는 우아한 이름을 가진 이 호텔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 자리한 귀신전용호텔이다. 생을 다한 이들이 잠시 머물며 이승에서 해결하지 못한 일이나 전하지 못한 사연, 쌓인 원한을 정리하고 가는 삶의 끝지점이자 죽음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다. 바로 그곳에서 벌어지는 귀신과 인간의 이야기다.

드라마 ‘도깨비’가 살짝 연상되기도 하지만 뭐 어쨌든 다 좋다. 다만 한 가지 불만인 것은

한 번씩 - 내가 느끼기에는 꽤 자주 - 흉측한 몰골로 불쑥 튀어나오는 귀신의 모습은 무방비로 시청중인 나를 기겁하게 했다. 그러니까 ‘판타지’와 ‘로맨스’라는 화사한 글자사이에 검은 그림자처럼 서 있는 ‘호러’라는 글자를 가볍게 무시한 결과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어릴 때도 그렇지만 지금도 귀신이 눈앞에 나타난다면 일단 도망치는 방법을 택하지 귀신과 맞장 뜨거나 예의바르게 인사하고 통성명을 할 만큼의 담력을 갖추지 못했다.

무서운데 왜 보느냐고? 막장드라마를 욕하면서도 보는 심리와 같다고나 할까? 그냥 그 다음 이야기가 궁금한 것이다. 거기다 주인공이 ‘연기도 잘하는’ 아이유와 ‘훈내 풀풀나는’ 여진구 아니겠는가. 안 볼 이유가 하나라면 볼 이유는 아홉이다.

내친김에 귀신이야기나 좀 더 해보겠다.

없는 담력이지만 용기내보겠다. 날도 더운데 까짓 거.

지금은 딱히 그런 것 같지 않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여름이 되면 TV에서는 납량특집으로 공포드라마를 방영했다. ‘납량(納涼)’이라는 단어는, ‘여름철에 더위를 피해 서늘한 기운을 느끼는 것’이라고 국어사전에 나와 있는데, 뜻에 비해 어딘가 무겁고 어둡고 음산한 기운을 품고 있는 단어라는 생각을 하고는 했다. 거기에는 늘 ‘공포’라는 단어가 지박령(地縛靈)처럼 따라다녀서인지도 모르겠다. 여튼 당시 납량물은 기괴한 형상을 하고 출몰한 귀신들이 무더운 여름밤을 책임지기 위해 종횡무진 활약하며 많은 이들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메뚜기만 한 철이 아니다. 귀신들에게도 비수기와 성수기가 있다면 아마 여기저기 불려 다니는 여름이 제일 바쁜 시기일 것이다.

40대 이상 된 이들에게 가장 무서운 공포물 하나를 꼽으라고 하면 단연 ‘전설의 고향’아닐까 싶다. 이 드라마를 보고자란 세대는 한자로 쓰인 궁서체의 제목과 함께 그곳에서 풍기던 서늘한 공포를 기억할 것이다.

무덤이 반으로 갈라지고, 그 안에서 소복을 입은 여인이 긴 머리를 풀어헤치고 나오는 장면이나 ‘내 다리 내놔’를 외치며 시체가 쫓아오는 장면, 구미호가 입에 피 칠갑을 한 채 사람의 간을 빼 먹는 장면은 정말이지 공포 그 자체였다.

‘전설의 고향’은 곧 ‘무서운 이야기’라는 말과 같은 의미로 쓰였다. 그도 그럴 것이 1977년부터 1989년까지 장장 12년 동안 방영되었으니 당시 이 드라마 한 번 안 본 이는 없을 것이다.

옛날부터 전해오는 전설, 민간 설화 등을 모티프로 600편에 가까운 얘기들을 풀어냈는데, 그 내용은 대부분 비슷했다. 먼저, 귀신이 나타나 인간에게 해를 입히는 것으로 시작된다. 한 마을에 이유없이 사람이 죽어나가고 흉년이나 가뭄이 들고, 그 와중에 지혜와 용기를 가진 이가 나타나 귀신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억울하게 죽거나 원한이 쌓이게 된 과정이 재현된다. 귀신을 죽음으로 내 몬 가해자를 찾아내 벌을 주고 마침내 쌓인 한을 풀어준다. 감사해하며 귀신은 저승으로 떠난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이 구성을 벗어나지 않으며 또한 ‘권선징악’의 교훈을이 담고 있다.

드라큐라, 강시, 각다귀, 좀비 등 나라마다 공포의 대상이 되는 귀신들이 있지만 다른 나라와

달리 우리나라 귀신이 갖는 차이점이 하나 있다. 바로 원한이 많다는 것. 오죽했으면 600편이나 되는 전국팔도의 억울한 사연을 가진 귀신들의 얘기를 12년이나 드라마로 만들었겠는가.

생각해보면, 흉측한 몰골로 나타난 귀신의 억울함을 해결해준 첫 번째 방법은,

먼저, 그의 억울한 사연을 들어주는 것이었다. 그 원인을 찾아내 해결해주는 것은 그 다음이다.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절반의 한은 풀린 셈이다.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다르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것.

‘경청(傾聽)이란, 상대의 말을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전달하고자 하는 말의 내용은 물론이며, 그 내면에 깔려있는 동기(動機)나 정서에 귀를 기울이고 이해된 바를 상대방에게 피드백(feedback)하여 주는 것을 말한다.’ 고 ‘산업안전대사전’에 쓰여 있다.

듣는다는 것은 곧, 그를 알아주고 헤아려주고 이해한다는 것이다.

소통의 기본이자 가장 좋은 대화는 바로 ‘경청’이라고 말한다.

죽은 이의 억울한 사연을 들어주는 이는 ‘무속인’이지만

살아있는 이의 억울한 사연을 들어주는 이가 굳이 ‘정신건강전문의’일 이유는 없다.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마음을 기울인다는 것.

마음을 기울인다는 것은 내가 너의 편이 되어주겠다는 의미다.

입이 하나고 귀가 두 개인 이유는,

말하는 만큼 두 배는 더 들으라는 신의 섭리가 아닐까.

제대로 보고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듣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나는 오늘 내가 만나게 될 사람들을 떠올리며 이 문장 하나를 마음에 새겨본다.

 

‘당신을 듣겠습니다. 귀 기울여.’

 

자유기고가 / 프리랜서 방송작가 김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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