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작가의 일상풍경 ③

여름을 상징하는 곤충이 초록잎 무성한 나무에 매달려 맴맴맴 기세등등 울어대는 매미라면

가을을 상징하는 곤충은 깊고 서늘한 밤 적막을 뚫고 귀뚤귀뚤 우는 귀뚜라미다.

여름과 가을을 소리로 표현한다면 바로 이 두 곤충의 울음소리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매미도 귀뚜라미도 모두 제 울음소리가 이름이 된 곤충들이다.

곤충도 각자 사는 계절을 닮는 것인지 무더운 여름 악다구니를 써대며 울어대는 매미는

가득이나 불쾌지수 높은 날이면 소음으로 들리기 일쑤인데

귀뚜라미 울음소리는 어딘가 마음을 차분하게 하는 서정적인 구석이 있다.

음악장르로 치면 매미가 샤우팅 창법의 락이라면 귀뚜라미 울음소리는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발라드 정도 되겠다.

그나저나 왜 새나 곤충, 벌레들이 내는 소리는 모두 울음소리라고 하는 것일까.

웃음소리나 얘기소리나 노랫소리일 수도 있을 텐데 말이다.

해서 나는 울음소리 대신 노랫소리라고 표현하겠다.

그것이 소리를 내는 이에게도 듣는 이에게도 훨씬 건강하고 긍정적인 표현이겠다 싶어서다.

그렇다. 이렇게 곤충들이 내는 소리에 대한 서두를 길게 쓴 이유는

며칠 전 내가 살고 있는 집으로 찾아온 가을 손님 때문이다.

초대한 적 없지만 초대한다 해도 선뜻 오지 않을,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오직 소리로서 거기 있음을 알리는 존재.

손님의 정체는 바로 귀뚜라미였다.

가을을 맞아 전국귀뚜라미협회에서 찾아가는 연주회 이벤트라도 열기로 한 것인지

집까지 방문해 생생한 라이브 무대를 펼쳤다. 무대장소는 다름 아닌 베란다였다.

우거진 풀숲에서 밤과 잘 어울리는 느린 BGM처럼 아련히 들려오던 소리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 멋진 무대에 선택받은 1인 관객인 나는 한심하게도 원고마감이 코앞으로 다가와 컴퓨터

화면에 코를 박고 앉아 글과 씨름하던 중이었다.

일말의 낭만이라고는 찾을 길 없는 매너없는 관객이 듣건 말건 귀뚜라미는

귀뚤~ 가을이에요. 귀뚤~ 가을인걸요. 귀뚜르르~ 가을이랍니다~ 노래하며

집안 구석구석 쌓인 눅눅한 여름을 털어내고 선선한 가을로 채워놓았다.

새삼스러운 고백이지만 나는 그렇게 매몰차고 야박한 사람이 아니다.

기꺼이 그의 관객이 되어주기로 마음먹었다. 가만히 노트북을 덮고 베란다로 향했다.

세상에. 귀뚜라미 노랫소리가 이러했던가.

그곳에서는 단맛을 채우며 여물어가는 과일의 붉은 빛깔과 사각사각 벼 포기 사이로 불어가는 바람소리, 바삭한 가을볕의 냄새가 배어 있었다.

이미 숱하게 들어왔지만 실은 비로소 처음 듣는 소리처럼 구체적이고 선명했다.

더위가 물러가고 찬바람이 불기 시작한다는 절기 ‘처서’가 지나고 찬바람이 불면

신기하게도 매미소리가 사라지는데 그 이유가 바로 '기온' 때문이라고 한다.

매미는 보통 30도가 넘을 때 가장 성량 좋게 노래하고 귀뚜라미는 24도를 전후해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내고 이보다 기온이 더 내려가면 성량이 줄어들고 템포도 느려진다고 한다.

그러니까 내가 들었던 귀뚜라미의 노래는 섭씨 24도에서 부른 가장 고운 소리였다.

그 소리를 듣고 있자니 나희덕 시인의 시에 음을 입힌 안치환의 <귀뚜라미>라는 노래가 떠올랐다. 나는 베란다문에 엉거주춤 기대앉아 귀뚜라미 노랫소리에 화음을 얹듯 이 노래를 흥얼거렸다.

 

귀뚜르르르~ 귀뚜르르르~

보내는 내 타전소리가 누구의 마음 하나 울릴 수 있을까

누구의 가슴 위로 실려 갈 수 있을까

 

그러다 문득 이 야심한 시간에 펼쳐지고 있는 이 상황이 멋쩍고 어딘가 청승맞아 보여 웃음이 나왔다. 아무렴 어떠랴. 나와 귀뚜라미의 콜라보로 이 가을을 이렇게나 근사하게 시작한 것을.

열린 베란다 창문을 열고 가로등빛이 쌓여가는 집과 거리를 내다보다 알게 되었다.

이 시간에 이렇게 창밖을 내다본 것이 초봄 이후 처음이라는 걸.

‘계절마다 조금씩 냄새가 달라진다지.

이글거리는 태양에 땅의 열기가 느껴지는 것이 여름냄새라면

가을은 달콤한 열매들이 익어가는 냄새가 맡아진다는데,

지금 그대의 귓가에는 어떤 소리가 들리고 코언저리에서는 어떤 냄새가 맡아지시는가?

계절이 오가는 순간을 소리로든 냄새로든 느껴보시게.’

어쩌면 전하고 싶은 게 그거였을까. 나는 제법 오래 창밖을 내다보며 서 있다 어스름 새벽이

밝아오는 시간에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선선한 기운에 발치에 밀어둔 홑이불을 끌어다 덮으며 문득 생각했다.

가을밤 들려온 귀뚜라미 노랫소리에 생각이 깊어진 건 계절 탓일까 마음 탓일까

 

아직 가을이 왔다는 걸 모르는 당신에게

계절이 오가는 걸 느끼지 못하는 당신에게

귀뚜라미 한 마리 놔드리고 싶다.

 

자유기고가 / 프리랜서 방송작가 김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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